[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구를 중심으로 하여 1931년 비밀공격 조직을 통한 주요인물 제거를 목표로 하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게 된다. 

한인애국단은 당시 침체되었던 임시정부의 분위기를 살리고 대일본 테러를 목표로 하였다. 

한인애국단은 김구(金九), 김석(金晳), 안공근(安恭根) 등이 간부로서 운영을 맡았고 테러를 수행할 단원으로는 유상근(柳相根), 유진만(兪鎭萬), 윤봉길(尹奉吉), 이덕주(李德柱), 이봉창(李奉昌), 최흥식(崔興植) 등이참여해 일본의 주요 인물을 제거하여 일본의 국가 운영 체게 및 대외침략에 타격을 입히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한인애국단의 첫 목표는 일왕이었다. 이봉창은 1931년 말 동경으로 비밀리에 잠입하여 1932년 1월 8일, 일본 국왕 히로이토가 동경 교외에서 신년 기념 관병식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일왕의 주변 사람들에게만 피해가 갔을 뿐 일왕에게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해 실패하였고 이봉창은 그해 10월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두고 중국 국민당의 기관지 ‘국민일보’가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했지만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했다”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일본은 이 제목 중 ‘불행히도’라는 단어에 대노하였고 일본군으로 하여금 상하이 학살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한인애국단의 두 번째 의거는 윤봉길이 실행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거행된 상하이 사변 전승 기념 겸 천장절(일본 국왕 생일) 기념식장에 잠입했다. 

윤봉길은 식이 거행되는 도중, 단상에 폭탄을 투척해 시라카와 사령관, 우에다 육군대장, 노무라 해군중장, 시게미쓰 주중 공사 등 일본군의 핵심인물 7명을 즉사 또는 중상을 입히는 업적을 달성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상하이 사변으로 일본에 대한 분노와 무력감에 빠졌던 중국은 윤봉길의 의거 성공에 엄청나게 놀랐고 중국 국민당의 주석 장 제스는 이에 큰 감명을 받아 “100만 중국군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극찬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의거는 중국 국민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윤봉길의 의거는 일본이 임시정부에 대해 더욱 탄압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정착할 때 까지 1932년부터 8년간 이동기를 맞이하게 된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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