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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9 3·1 운동 이후 서간도에서의 무장 투쟁 [키워드한국사]

보도본부 | 이호 기자

기사승인 2018.02.11  17: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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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895년 10월 8일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전국 각지에서는 애국지사들이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웠다. 그러나 일제는 1910년 무력으로 대한제국을 집어 삼켰고 이에 항일투쟁을 하던 애국지사들은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활동무대를 옮겨 장기항쟁을 꾀했다.

이런 와중에 3·1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많은 의병과 유림 세력 등 독립운동가들은 만주로 모였다. 

이 지역은 이미 1910년 말부터 이회영, 이시영 형제와 안태국, 김구, 이동녕 등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해 활동하고 있었고 의병 계열 인사 560명은 3.1운동을 계기로 각종 단체를 해체하고 대한독립단을 결성했다. 

이들은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일제의 앞잡이 기관인 일민단, 보민회, 강립단 등을 습격하여 소탕하는 것과 훗날의 대규모 항일전쟁에 대비해 청년들의 군사훈련에 주력하였다. 

독립단원들은 또한 수십 명 단위의 소규모 부대를 조직하여 함경북도 갑산 일대의 일본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는 등 국내에 진입해 일본 기관들을 공격하고 친일파를 숙청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1920년 12월 한족회 대한청년단연합회 등과 통합해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총영으로 개편된다.

그리고 1919년 4월에는 부민단이 한족회로 발전하였다. 한족회는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무장 투쟁을 영도할 군정부는 만주에 건립하는 것을 합의하였다. 

또한 3·1 운동 당시 서울에서 만세시위 운동을 주도한 조재건, 오학수 등은 만주로 건너가 안둥 현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 안병찬을 총재로 추대했다. 대한독립 청년단은 상해임시정부의 후원단체로서 의용대를 편성하여 독립 운동자금 모집 및 조달에 주력했다. 또한 반도청년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정책 및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그리고 일본 육사 출신의 이청천 등이 망명해 신흥학교에 참가하면서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1919년 5월) 1920년 폐교될 때까지 2천 여 명의 졸업자를 배출하여 독립군 양성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한족회는 1919년 11월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 군정부를 설립하고 이상룡을 독판으로, 여준을 부독판으로 임명하였고 이청천을 사령관에 부임시켜 군정부의 기능을 갖는 서로군정서로 개편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 9월 평북독판부와 대한청년단연합회, 독립단, 한족회 등의 세력은 통합운동을 벌이고 있다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해 임시정부 직속의 독립군 부대로서 광복군총영을 설치하게 된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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