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북간도 지역은  한인들이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3.1운동이 발발하자 여러 단체가 난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홍범도는 자신이 거느리던 의병세력을 중심으로 대한독립군(1919.8)을 결성하여 최초로 갑산과 혜산진 등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간민회가 국민회로 개칭(1919.11)하여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벌였다. 이 단체는 북간도에서 가장 큰 단체로 성장하였고 국민회군을 조직하여 항일전을 수행하는 동시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후원하는 등의 활동도 하였다.

그리고 대종교의 주요 인물인 서일이 북간도로 망명하여 조직한 중관단은 정의단, 군정회의 이름을 거쳐 상해 임시정부의 주요 전투군단이 될 것을 자처하면서 김좌진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북간도 최강이 군단인 북로군정서(1919.11)로 거듭났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등은 대한북로독군부군을 결성하여 봉오동 골자기로 적을 유인,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는 봉오동 전투(1920.6)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4명의 전사자와 2명의 중상자만을 내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일제는 중국측에 독립군 공격을 제시하였지만 미온한 반응을 보였고 이에 일제는 마적들을 매수하여 훈춘의 민가와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하여 방화하고 일본인을 죽이게 하는 훈춘사건(1920.10.2)을 조작하였다. 일제는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독립군 부대를 공격하고 나섰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군은 1920년 8월 일본 영사관에 침입하여 일본군 제13사단과 제14사단, 제21사단이 북로 군정서군을 토벌한다는 계획을 알아냈다. 

이에 약 2,800명의 북로 군정서군 등의 독립군은 험악한 산세를 자랑하는 백운평 골짜기에 매복하여 일본군 3개 사단 5만 명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일본군 3,300명을 사살하여 대파하는 쾌거를 이룬다. 

일본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 봉오동 전투를 시작으로 독립군은 지형의 이점을 살려 일본군에게 패배의 쓴맛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제는 독립군에게 당한 수모를 무고한 한국인에게 되갚기 시작한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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