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24년경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선립 운동이 일제에 의해 좌절되자 민족주의 우파의 일부 인사들은 자치운동론(일제와 타협하여 자치권과 참정권을 획득하자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광수와 최린 등이 일제의 식민 지배를 인정하면서 본격적인 자치 운동에 나서자 이상재와 안재홍 등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이들을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하며 사회주의 세력과 협동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조선 총독부는 이를 교묘하게 부추겨 더욱 분열을 조장하였다. 

이에 안창호는 북경, 상해 등지에서 여러 독립 운동 단체들의 단결을 호소하였고 1926년 유일당으로서 대독립당북경촉성회가 창립되었다. 또한 학생과 사회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6·10만세운동에 민족주의자들도 함께 참여하면서 대립각을 이루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민족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1926년 7월 사회주의 계통인 서울청년회와 민족주의 계통인 조선물산장려회가 제휴하여 조선민흥회를 조직하는 등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단합의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6년 11월, 사회주의계 단체인 정우회는 분파 투쟁을 청산하고 사상 단체를 통일, 경제 투쟁에서 정치 투쟁으로의 전환 등을 주장하면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의 제휴를 모색하는 정우회 선언을 하게 되고 이는 신간회 창립의 주요 계기가 되었다. 

사회주의가 유입된 이후 민족 해방 운동 선상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갈등이 일어나 분화되었다. 하지만 일제에게 벗어나기 위해서는 민족의 역량을 한 곳에 모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전제였기 때문에 양 세력 모두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1927년 2월 15일, ‘신간출고목(新幹出古木 : 고목에서 새 가지가 솟는다)’라는 말에서 이름을 딴 신간회를 창립하게 된다. 신간회는 개인 가입제를 택하여 당적 형태를 취하였고 중앙의 본부가 절대적인 권위를 갖게 하였다. 신간회는 1929년 기준 전국 144개의 지회와 4만 여명의 회원을 보유한 전국적인 단체로 성장하였으며 일본과 만주에도 지회 설립이 시도된 최대의 합법적 항일 단체가 되었다. 

신간회의 3대 강령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신간회는 청년 단체와 민중 단체, 언론사를 중심으로 하여 민중 대회와 연설회를 개최하는 등 민중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고 노동 단체, 농민 단체, 여성 단체 및 청년학생 단체와 연계하여 이들을 지도하고 운동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29년 광주학생 운동을 계기로 하여 대대적인 반일 시위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지만 허헌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 다수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고 1931년 5월 15일 민족주의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산을 하고야 만다. 

신간회는 최초의 민족 유일당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사상이 다르더라도 민족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이론을 직접 실천한 증거가 되었다. 비록 빠르게 해산이 되었지만 해방 이후 좌우합작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 의의를 갖는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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