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일제 강점기는 종교 활동 역시 원활하지 않았다. 일제가 신사참배 등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를 따르게 강제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종교 활동 역시 독립을 위한 활동의 일환이 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의 개신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조선기독교여자청년회연합회(YWCA)는 신문화 운동으로 농촌 강습소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30년대에는 일제가 남산에 경성신사를 건설한 것을 시작으로 산간벽지까지 신사를 만들어 참배를 강요하였는데 이에 개신교는 처음에는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였지만 결국 감리교와 장로교는 일제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만다.

천주교는 ‘경향잡지(1911)’를 발간하여 민중 계몽 운동을 주도하였고 만주에서 항일 무장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하였다.

천도교는 1922년 제 2의 3·1 운동을 시도하기 위해 자주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고 1922년 6월 첫째 일요일 최초로 어린이날을 제정하여 행사를 진행했다. 소파 방정환을 주축으로 소년 운동이 활성화 되어 통합 단체로 조선소년연합회가 조직되었지만 지도자들 사이의 사상과 이념 대립으로 인해 소년운동도 분열되었다. 또한 중일전쟁 이후 청소년 운동이 일체 금지되면서 청소년 단체들은 모두 해산되었다.

천도교는 또한 농민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운영하고 순회강좌를 하거나 강연회 등 계몽활동을 하였고 만세보, 어린이, 개벽, 학생 등의 잡지 등을 간행하여 민중 계몽과 근대 문물 보급에 기여하였다.

단군교는 나인영 등에 의하여 1909년 국조 단군을 믿는 한국 고유의 민족 종교로 창시되어 1910년 7월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제의 남한 대토벌 이후 대종교 총재 서일은 만주로 본부를 이동하여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911년 무장 투장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였고 3·1운동 이후 정의단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이 조직은 이후 대한군정서, 북로군정서로 발전하여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끄는데 주역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불교는 왜색불교에 저항하는 성격을 가졌다. 사찰령, 승려법을 제정하여 총독부가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에 예속시키려 하자 한용운 등이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한용운은 불교 유신론을 펼처 불교의 쇄신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민족 종교의 전통을 지키려 하였다.

원불교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박중빈이 창시하였는데 불교의 현대적 생활화를 추구하였으며 개간사업과 저축 운동, 남녀평등의 새 생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종교는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인 만큼 일제에 저항하며 계몽적인 성격을 가지는 성향이 컸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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